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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③

閒林 2020. 1. 25. 05:35

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

(Osaka-시립동양도자미술관)

 201x. Early December


1

◑ Yaki21 , 色絵草花文 甁(有田燒,17c) , Sony Nex-F3,



2

◑ Yaki22 , 色絵 牧丹椿文 八角壺(有田燒,18c) , Sony Nex-F3,



3

◑ Yaki23 , 色絵 麦畳瓢簞文 大皿(有田燒,17c) , Sony Nex-F3,



4

◑ Yaki24 , 色絵 秋草文 德利(京燒,17c) , Sony Nex-F3,



5

◑ Yaki25 , Persian Jar with 2 handles (Iran,13c) , Sony Nex-F3,



6

◑ Yaki26 , 白磁  牧丹唐草文 甁 (金,12c) , Sony Nex-F3,



7

◑ Yaki27 , 三彩貼花 寶相花文壺 (唐, 8c)  , Sony Nex-F3,



8

◑ Yaki28 , 白磁刻花 牧丹文 甁 (北宋,11c) , Sony Nex-F3,



9

◑ Yaki29 , 黑釉刻花 牧丹文 梅甁 (北宋,12c) , Sony Nex-F3,



10

◑ Yaki30 , 綠釉黑花 牧丹文 甁 (金,12c) , Sony Nex-F3,




  1. 여기서부터 초기 일본자기다. [본문으로]
  2. 17세기초 명이 망해갈무렵부터 1680년 강희제가 대륙을 평정할때까지 중국은 전쟁터였다. 네델란드 동인도회사는 중국으로 부터 도자기를 수입해 큰 이윤을 남기다가 중국이 전쟁터가 되자,공급처를 일본으로 옮긴다. 일본의 이마리야끼(처음엔 아리타야끼를 수출하던 항구이름으로 불렀던 모양이다)는 유럽에서 첫 명성을 얻는다. 이와는 별도로 네델란드는 자체생산 필요성을 느껴 델프트(Delft)에서 첫 도기제작에 들어간다. 유럽은 아직 자기를 만들지 못했으므로 도기만 제작했고 코발트 유약을 이용한 청화도기에 집중했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Delft blue 는 Delftware의 대명사가 되었다. 나도 Delft blue의 네델란드 나막신 자기팬던트와 cheese plate를 기념으로 사가지고 왔었다. 그리고 청자를 재현했다는 델프트접시를 선물로 받았는데, 유약이 초기 올리브색 청자빛으로 송과 조선의 청자에서 보여주는 비색에 비할바 아니며,도기인지 크고 무거워 애물단지가 되버린 상황이다. [본문으로]
  3. 18세기들어 독일의 작센공이 재정난 타파를 위해 흰색의 황금으로 통하는 자기를 만드는데 온힘을 쏟아, 마침내 유럽에서 처음으로 자기를 만드는 기술을 찾아낸다. 1709년 드레스텐에서 첫 사업을 시작했으나 이듬해 바로옆 Meissen으로 옮겨 유명한 Meissenware가 탄생한다. 이 마이센에는 고령석(Kaolinite) 광산이 가까이 있어 지금도 채굴하는 정도의 매장량이라 한다. 이어 영국에서도 Wedgwood가 자기를 만들자 델프트도기는 경쟁력을 잃고 쇄퇴하여 실용자기보단 공예품을 만드는데 주력하며 명맥을 유지한다. 영국의 Wedgwood는 18세기말 동물뼈를 첨가한 한층 가볍고 강한 Bone China를 개발하여 잘나갔으나 리만사태로 2009년 파산했다. 유럽이 자기를 만드는데 성공하자 동양자기도 주문이 줄게 되었으나 19세기말 파리만국박람회를 계기로 다시 일본자기가 2차 붐을 일으킨다. [본문으로]
  4. 교야끼(京燒)는 화려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아리타야끼가 주로 유럽으로 수출되는 상품이었던데 비해 교야끼는 교토의 황실과 귀족들이 애호하던 자기였다. 아리타야끼가 자기 빚는 기술이 돋보이는데 비해 교야끼는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그림으로 유명하다.기요미즈데라(淸水寺)가 있는 히가시야마(東山)에서 만들어져서 기요미즈야끼라고도 부른다. 1620년 명이 멸망하면서 중국의 도공이나 화가가 일본으로 피난왔는데 그들에게서 배운 그림기법이 교야끼의 탄생배경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본문으로]
  5. 페르시아 도자기를 전시한 방이 따로 있다. 진흙에 유리질의 가루를 섞어 하얀 백토 색을 낸 도기로 윗부분에 당초문을 새기고 아래에는 아랍문자를 새겨넣었다. 청색유약에 담근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본문으로]
  6. 여기서부터는 중국도자기이다.백자에 철분섞인 흙을 바르고 주변을 깍아내 모란당초문만을 갈색으로 남긴병. [본문으로]
  7. 당삼채(唐三彩)는 납이섞인 유약에 색소를 넣어 색을 내는것으로 당나라때 특히 유행했다. 항아리 겉에 보상화 무늬를 따로 붙여 채색했다. 보상화는 보련화(宝莲花)라고도 하며 여래의 장엄함을 형상화한것이다. 만다라화라고도 부르며 만다라의 중앙에 장식하기도 한다. 상상의 꽃으로 모란,연꽃,국화를 합성한 모양이다. 불교 3길상의 하나이다. 이 도자기는 당나라 묘의 부장품으로 발견되었다한다. [본문으로]
  8. 병 주둥이가 떨어져 나갔다. 병표면에 모란당초문을 깎아낸것이다. 중국매병은 뚱뚱하다. [본문으로]
  9. 백자에 흑유를 바르고 주변을 깍아내 베경과 대비시킨 매병으로 당시 유행하던 기술이란다. [본문으로]
  10. 백자에 흑유를 바르고 주변을 깍아내고 투명유약을 발라 구운후, 녹색유약을 발라 저온에서 다시 구웠단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