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road/EastAsia

태국-방콕②-왓수땃

閒林 2020. 2. 10. 09:03

태국-방콕②-왓수땃

(Thailand-Bangkok②-Wat Suthat)

 201x. mid Dec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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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kk12 ,Democracy Monument , Red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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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kk13 ,Giant Swing , Redmi7,



3

◑ Bkk14 ,Giant Swing , Redmi7,



4

◑ Bkk15 ,Wat Suthat Thepwararam , Red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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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kk16 ,Wat Suthat -Viharas , Red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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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kk17 ,Wat Suthat -Ubosot , Red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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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kk18 ,Wat Suthat -Ubosot , Red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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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kk19 ,Wat Suthat -Ubosot-southside , Red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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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kk20 ,Wat Suthat -Ubosot-westside , Red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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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kk21 ,Wat Suthat -Ubosot-northside , Red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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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kk22 ,Wat Suthat -Viharas , Red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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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kk23 ,Wat Suthat -Ubosot outdoor painting , Redmi7,




  1. 타이 국도의 기점이란다. 여기서 사방으로 연결되는 국도는 이곳을 "0" 지점으로 삼는다. 입헌군주제(1932-)로 바뀐걸 기념하기 위해 1940년 세워졌는데 4개의 날개형상은 1932년 쿠테타를 일으킨 군대를 상징한단다. 그때문인지 지금까지 12번의 군에 의한 쿠테타가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명목상 선거에 이긴 정권이지만 실질적 군부세력이므로, 다음번 민간정권이 들어섰을때 이 탑을 민주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찾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본문으로]
  2. 그네 뒷편사원이 왓수땃이다. 마치 왓수땃에서 세운 그네로 보이나 아니다. 1784년 라마1세때 브라마신전(Devasathan, 사진 오른쪽 길 건너에 있다)의 앞에 세운게 번개에 파손되어, 20세기에 이곳으로 옮겨 수복했단다. 브라마신을 기리는 행사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던 모양. 그래서 라마2세때 금지했는데 1920년 이곳으로 옮겨 재개하다가 또 사상자가 속출하자 1935년에 행사는 영구 금지되었단다. [본문으로]
  3. 행사의 기원은 이렇다. 브라마신이 세상을 창조했을떄 땅은 아직 고정이 되지 않았다. 나가(Nagas)들이 한쪽은 산(메루산)을 칭칭감고 다른쪽은 땅을 감아 제자리에 고정시키는 일을 했는데,마침내 땅이 제 자리에 찾아 들어가자 나가들은 만족하며 바다로 돌아갔단다. 그네의 기둥은 산을 상징하고 받침돌은 땅과 바다를 상징한단다. 이를 기리기 위해 행사를 열었는데, 돈을 넣은 주머니를 기둥에 매달고 그네를 타면서 이 주머니를 나궈채어 차지한단다. 높이가 30m라니 손을 떼는 순간 추락사하지 않는게 다행하다. 이 행사(Triyampavai-Tripavai)는 힌두교지역에선 흔하단다. 지금은 왓 수땃(Wat Suthat) 바로앞에 있는데 여기에 또 도시전설이 있다. 밤이되면 왓수땃 앞에 아귀들이 나타난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불이 없는 어두운 밤이면 이 거대한 그네가 마치 귀신처럼 보였을 거란 추측이다. 그래서 '왓사켓의 아귀'와 '왓수땃의 아귀(Preta of Wat Suthat)'가 쌍으로 유명한 모양이다. [본문으로]
  4. 방콕엔 왕실사원이 10개 있다는데 그중 하나이다. 라마1세때 지어졌다. 외국인용 입장료가 100바트라 적혀있는데, 매표소도 없고 그냥 절수리비 헌금 형식으로 받는 모양이다. 그래서 문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옆에서 불상닦는 아가씨에게 물으니 오히려 입장권이 필요하냐며 되묻는다. 내가 태국인같지는 않을텐데....버스채로 오는 단체 관광객상대의 보여주기식 입장권인 모양이다. 알고보니 사원주위로 문들이 곳곳에 나있는데 지키는 사람도 없다. 지역사람들은 대부분 주변 문으로 들어온다. 뭐, 공짜 구경보단 못하지만 헌금한 셈치면 그만이다. 사원도 제법 크고 쉬기도 좋아 구경할만하다. 비하라의 4방 주위회랑에는 156개 부처상(선정인)을 안치해 놓았다. 이것도 태국에서 흔히 보는 광경이다. [본문으로]
  5. 안내서에는 Vihara(精舎,산스크리트어)라고 되어있는데, 정사라면 보통 승려가 거주하는 수도원 전체를 의미하이므로 법당으로 봐도 될것 같다. 타이에선 법당(法堂)을 위한(wihan)이라고 부른다. 처음엔 이곳이 우보솟(대웅전)인줄 알았다. 정문을 들어가마 마자 보이는데 정문이 북쪽을 마주보고 있어 건물입구가 북쪽을 향하게 되므로 우보솟이 아닌게 분명하다. 우보솟은 안쪽에 따로 있다. 하지만 이 안에 타이최대(실내부문인듯)의 8m 불상이 있고 벽화(Murals)도 유명하여 공사중 폐쇄한걸 보곤 엄청 실망했다. 이곳을 방문한 1순위가 허사가 된것이다. 주위 바닥에는 화강암 타일을 번쩍거리도록 깔아 놓았다. [본문으로]
  6. 타이 불교사원의 대웅전은 우보솟(Ubosot)이라 부른다. 북쪽지역(치앙마이등)에선 사원의 중심건물이 스투파(stupa,불탑-타이에선 Chedi or prang이라 한다)인데 비해 남부지역(방콕등)은 우보솟이 중심이 된다. 건물은 타이 전통양식으로 지어지는데, 먼저 주춧돌(Bai Sema-돌을 깍아 둥근 球로만든것)을 팔방 여덟군데에 묻어 신성한 장소임을 표시한후 그 안쪽에 건물을 짓는다. 건물주위엔 기둥을 올리는데 이 기둥은 타이 전통 가옥을 형상화 한다. 중남부타이는 평원지대로 홍수가 잦고 뱀과 같은 독물이 많아 평지에선 생활못하고 나무기둥을 올려 수상가옥처럼 만들어 생활한다. 이 나무기둥을 형상화한것이 우보솟의 기둥이다. 그리고 지붕은 복층으로 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원래는 현관의 작은 비막이 지붕이 점점 커져 기본지붕과 겹쳐지는 독특한 모양으로 발전했다한다. 보통 2~3층 구조인데 왕실 사원에는 4층 지붕도 있다. 이 복층지붕끝을 장식하는 조각을 람용(Lamyong)이라 하며 대만사원의 螭吻(츠완)장식과 유사하다. 우보솟의 입구는 중국문화권과는 다르게 동쪽을 향한다. 입구 반대쪽 서쪽끝에 아홉번째의 주춧돌을 묻고 그 위에 부처상을 안치한다. [본문으로]
  7. 비하라(법당) 대불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엄청크다. 사방을 장식하는 벽화(Murals)도 법당과는 별차이가 없을거로 짐작된다. 태국의 불교는 스리랑카에서 전해진 남방불교이다. 남방불교는 개개인 승려(신도는 아니다)의 깨달음을 주목적으로 한다. 그래서인지 태국의 불상은 대부분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는 순간을 표시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가끔씩 명상할때의 모습인 선정인(禪定印)을 한 불상이나 열반시의 와불(臥佛)이 보이지만 우보솟에는 항마촉지인상이 대부분이라 아주 단조롭다. 이 항마촉지인 불상은 매우 중요한 설화를 담고있다. [본문으로]
  8. 불교의 중심교리는 고집멸도(苦集滅道)로 4성제(四聖諦)라 한다. 집착(集)에 의해 모든 고통(苦)이 일어나므로 집착을 없애면(滅) 깨달음을 얻게된다(道). 집착은 욕망에 의해 주로 발생하는데,이 욕망이란 마음(心)이 일으키는 것으로 허상(空)이다. 불교세계관은 홀로 존재 또는 발생하는 것은 없고 많은 조건과 인연의 집합으로 일어나는 연기론(緣起論)이어서 모든게 찰나적이며, 영구적인건 없어 결국은 공(空)인 것이다. 이렇게 중심만 열거하면 쉬워보여도 그 세부를 이해하기에는 평생을 보내도 어려운 철학이다. 왕이나 귀족들은 그나마 설법을 둗고 조금은 이해할 정도는 되지만 무지한 백성들은 들어봐야 무슨 소리인지 알수 없다. 장로급들이 왕이나 귀족들에게 설법하면 그 댓가로 절도 지어주고 후원도 넉넉히 해주나, 무식한 백성을 상대로 포교하는 말단제자들이야 어려움이 한둘이 아니다. 초기 불교는 수행을 위해 필요한 음식물시주 받는 것만 허용하고 그것도 탁발이었다. 그러나 백성을 상대로 포교하는 말단제자들이야 포교를 위한 기본시주가 필요하지 않을수 없어, 얼마 지나지 않아 상좌부와 대중부로 분열되버린다. 장로들의 규제를 벗어나 독립한 대중부는 무식한 백성들을 위한 교화방식을 만들어 가는데, 당연히 교조인 석가모니를 신격화하기 시작한다. 석가모니가 금지한 부처상을 만들고, 전생설화를 만들거나 태어나자마자 걷거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쳤다는 설화도 만들어진다. 그중 가장 중요한 설화가 바로 보리수아래에서 깨달음을 얻는 설화이다. 이 얘기는 다른 종교와 원조논쟁이 있으나 ,설화에 원조가 되는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라는 걸 이해못하는 작자들의 논쟁이다. [본문으로]
  9. 얘기는 이렇다. 우선 살아있는 것의 욕망을 먹고 살아가는 종족인 마라족(Maras)을 만들어 낸다. 불교는 힌두교에서 발전한 종교인데, 힌두교의 주요신(천상신과 지하신)은 석가모니의 제자가 되고 불교의 호법이 되버렸다. 그래서 새로운 신이 필요했던 모양. 이 마라족의 왕이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구제하면 마라족이 굶어 죽게생겼으므로 보리수 아래의 싯달타를 유혹하고 협박하여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방해한다. 허나 이때 이미 싯달타는 깨달음을 얻은지라,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지하신을 불러 그를 증명하라 한다.(지하신이 알 정도면 마라가 모를리 없으니 무슨? 의아하지만 설화란 원래 그렇다). 이 설화는 깨달음의 가장 큰 적이 욕망(집착)이란걸 쉽게 알려주기 위해 만든 설화이며, 사성제를 이해못해도 이 불상을 보면 쉽게 교리를 알수 있도록 만든 설화이다. 그러므로 이 항마촉지인상은 남방불교의 정수인 셈이다. 그런데 이 불상앞에 헌납하고, 금박을 사서 붙여가며 소원을 성취하도록 도와달라며 기원하는 이들을 보면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욕심(집착)을 버리라고 부처상은 말하고 있는데 말이다. 남방불교는 수행자의 불교라 신도라는 개념이 모호하여 벌어지는 일이다. 힌두교신자의 관습이 그대로 남은거로 보인다. 여담으로 마라왕(중국어로 마왕(魔王),천마(天魔)로 번역된다.중국어 魔가 만들어진 어원인듯 싶다)이 처음으로 석가모니불에 대항하는 존재가 되버리니 그 위치가 엄청 높아진다. 힌두교에서 벗어나 불교만의 세계그림이 만들어지며,일설에 의하면 삼계중 욕계의 수미산에는, 3층에 제석천(인드라=옥황상제)가 있고 4층에 미륵불(미래 부처가됨)이 있고 제일 꼭대기층에 마라족이 산단다. 믿거나 말거나... 불교는 철학적 교리로 시작하여 나중에 설화가 만들어진 특이한 종교다. [본문으로]
  10. 남방불교는 상좌부의 맥을 이었다. 아쇼카왕이 아들중 한명을 실론섬(현 스리랑카)에 보내 포교한게 시작으로 인도본토에서 불교가 쇠망해 갈때도 영향을 받지 않고 초기불교에 가장 가까운 전통을 가지고 있다. 대중부는 중국쪽으로 흘러가 북방불교화한다. 인도본토에선 힌두교에 눌려 신비주의적 탄트라적 요소를 담아 8~9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는데 한마디로 유물론적 불교라할 만하다. 이 잔존불교는 티벳에 전해지며 라마교로 맥을 유지한다. 이들은 경의 개념보다 현상에 집중한다. 행동이 중요해지고 소리가 우주의 이치를 담으며, 법구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색모래로 만다라를 고생해서 그려내곤 일순간에 지워버리는 행위를 하거나 옴마니반메훔이 우주의 법칙이 되고 금강저의 힘을 신봉한다. 이에 비하면 북방 선종은 관념론적 불교의 극단이다. 이 유물론적 인도불교와 관념론적 불교가 논쟁을 벌이면 당연히 관념론적 불교가 승리할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당나라 문성공주가 티벳에 시집와 불교를 전파한지 150여년이 지난 8세기말(789), 인도불교 승려와 중국선종 승려를 초청해 논쟁을 벌였다.(桑耶寺論諍=삼예논쟁).결과는 인도승(중관학파)이 승리하여 티벳은 인도불교를 국교로 삼는다. 당나라 말기라면 천재들이 선승이 되던 시절이다. 명문학교에서 선발된 학생들과 곧 폐교가될 시골학교 선발학생간의 싸움이다. 더구나 중관학파라면 공(空)사상의 원조지만, 공사상이라면 선승들만큼 통달할 수가 없을텐데, 졌다면 이치가 안맞는다. 여기에는 여러설이 있지만 내 가설은 이렇다. 처음부터 지는 싸움이었다. 선사(禪師)들은 논쟁으로 남을 설득하고 깨닫게하는 데는 도무지 재능이 없다. 못알아 들으면 두들겨패서 알아듣게하거나 그것도 안되면, 자기가 일어서 떠나버리는게 그들의 덕목이다. 그러니 논쟁에서 상대가 깡떼부리면 절대 못이긴다. 더구나 이기나 지나 어차피 부처님 모시는건데, 그냥 잘해보시라고 절하고 나왔을거다. 내가 마하연이었으면 그랬을거다. [본문으로]
  11. 북방(대승)불교에선 깨달음보다 구제활동이 중요해진다. 즉, 십우도(十牛圖)에서는 해탈후 2단계가 더 있다. 깨달음을 얻으면 보살이 되며 중생구제의 보살행을 거쳐야 부처가 된다. 북방불교는 중생구제가 목적이므로 아주 극단적 종파까지 생겨난다. 정토종에선 하루세번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외워도 극락정토에 갈수있다고 설한다. 법화경(妙法蓮花經)은 더하다. 철학적 요소는 깡그리 지워버리고 법화경을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구원받는다고 한다. 이 정토종과 일연종은 일본에서 상당히 위세를 떨쳤다. 극락정토에 가는 것은 기독교의 천당에 가는 개념과는 다르다. 극락정토에 가서야 비로소 부처가 되기위한 수행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본문으로]
  12. 태국은 1200년전부터 크메르-앙코르제국의 지배를 거쳤으므로 그 문화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세속적으론 힌두문화가 지배하고 종교적으론 불교가 지배한다. 불교가 예술과는 거리가 멀기땜에 예술분야는 대부분 힌두문화가 지배적이다. 춤이나 공연 같은 종합예술에선 이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왕명이 라마인것도 힌두적이다. 라마는 비시뉴신의 10 아바타중 하나이다. 그래도 불교와의 관계도 빼놓을순 없어 긴 이름안에 'Buddha'는 꼭집어넣는다. 불교사원에서도 힌두교적 요소가 병존한다. 힌두교 주요신들이 불교의 호법신이 되었으니 별문제는 아니지만 그 모습은 힌두적이다. 여기 우보솟 주춧돌이 놓인 외벽의 문을 장식하는 그림은 가루다와 나가가 싸우는 그림이다. 이 둘은 앙숙이다. 가루다가 천상신이고 나가가 지하신이다. 짜끄리왕가의 문장이 가루다여서 그런지 가루다의 위용이 대단하다. 단, 치앙마이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치앙마이는 스스로 타이불교의 수도라 자칭한다. 그래서 힌두교가 상당히 배척받는다는 느낌이 강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