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road/EastAsia

태국-치앙마이-Day1-①왓치앙만

閒林 2021. 3. 7. 17:27

태국-치앙마이-첫날①-왓치앙만

(Thailand-ChiangMai-Day1-Wat Chian Man) 

201x. mid December


 Pic-CM01A01 , Wat Chiang Man ,   Redmi7,

치앙마이는 란나왕국의 수도다. 지역사람들은 태국불교의 수도라 자칭한다.  이곳에는 75개정도의 사원리스트가 있었는데 그중 30개 정도의 사원들을 3일간 둘러보고 4일째는 박물관을 둘러볼 계획을 세웠다. 동굴탐험이나 국립공원 빼면 다른 관광거리가 없다. 처음엔 버마,라오스와의 국경지역에 있는 악명높은 Golden Triangle에 갈 생각도 해봤으나, 30여분 배타고 국경지역 왔다갔다 할 목적으로 차로 왕복 6~7시간을 허비해야하는 비경제적 일정은 싫어, 그냥 사원 순례로 정했다. 마지막날은 관광않고 박물관에서 시간 보내다 비행기타는게 통상플랜이어서 이번에도 박물관에서 하루 보냈으나, 이곳 치앙마이 박물관은 볼것없고 대부분 보물은 각 사원들에 있으니 사원관광이 메인이다.  - 치앙마이에서 가장 중요한 절 몇개를 꼽으라면, 가장 오래된절 왓 치앙만, 가장 큰 쩨디와 지신(City Pillar)을 모신 왓 쩨디루앙,  황금빛절 왓 프라싱, 그리고 성 외곽에 있는 성산 도이수텝의 왓쁘라땃도이수텝과 왓수완독 5개정도이다. 쩨디루앙과 프라싱은 둘다 왕의 유골을 묻은 쩨디가 있는 왕실사원이고, 왓도이수텝과 왓수완독은 부처사리를 모신 절이다. 왓수완독은 큰뼈를 모셨기에 전세계 불교도의 순례지가 되어 엄청커져 있다. 성내 3사원은 첫날 다 방문했고 왓도이수텝은 2쨋날 방문했다. 왓수완독은 일정봐가며 결정하기로했는데 결국 안갔다.(게을러져서...소소한 이유는 2일쨰 왓쁘라땃도이수텝여행기에 적음).

 

 Pic-CM01A02 , Wat Chiang Man -Chedi * Wihan,   Redmi7,

1292년 Mangrai왕이 치앙라이(본인이름을 땃다고한다)에서 치앙마이로 수도를 옮기며 란나(Lanna)왕국이 건국했다. 1296년 라와(Lawa)족이 살고 잇던 성채를 그대로 활용하여 치앙마이에 수도를 건설하게 되는데, 그 캠프지역으로 삼은곳이 이 치앙만이며 치앙마이에 세워진 첫 사원이 된다.(1297). 이곳역시 크메르-앙코르지배지였으므로 성채의 모습은 크메르식 성곽모습을 하고 있다. 한변이 1.6km의 정방형 성벽을 물담긴 호가 둘러싼 형태다. 태국역사는 수백년전부터 왕국이 있었다고 주장하나 동남아 역사는 기록이 없어 대부분 중국 기록을 참조한다.아마 이전엔 슈고타이지배 받는 부족이었다가 독립왕국화한걸로 보인다.  
     이곳 여행은 사원순례가 목적이므로,바깥 호텔보다는 성채안의 작은 호텔로 정했다.  치앙만사원 바로 앞 호텔로 깨끗하고 좋았으며 움직이는데 더 할나위없이 좋았다. 현재는 치앙마이 옛성벽이 다 무너져 없고 물고인 호는 남은 상태다. 아침에 가장 먼 곳에 잇는 사원까지 그랩카로 가서 천천히 걸어 호텔까지 돌아오며 루트안의 사원 모두를 둘러보는 Route로 짜면 하루 종일 걷는 거리라봐야 2~4km정도니 무리도 없다. 치앙마이는 별도의 공중변소는 없고 사원변소를 공중화장실로 사용하므로 급하면 가까운 사원을 찾으면 되니 정말 편했다. 더구나 스님들도 사용하는 변소로 동남아지역으로보면 깨끗한편이다. 관광지면서도 불교적 관념이 몸에 베인듯 다른사람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고 상인들이 호객행위조차 하지않으므로 지금까지 경험한 여행지중 가장 편하고 좋은 여행지였다.마치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산책하는 기분이 들정도다. 더 좋은건 물가가 워낙 싸므로 한국에서의 산책보단 더 편했던듯하다. 음식도 중국식이 많아 방콕보단 덜맵다.

 

 Pic-CM01A03 , Wat Chiang Man-Wihan ,   Redmi7,

치앙마이에선 법당(Vihara,여기선 보통 Wihan이라한다)이 우보솟보단 더 메인이 된다. 가장 중심은 쩨디이다.

 

 Pic-CM01A04 , Wat Chiang Man-Chedi ,   Redmi7,

쩨디(Chedi)는 15 코끼리가 탑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치앙마이의 쩨디를 지고 있는 코끼리는 대부분 앞동체 반이 나오도록 만들어진게 특색이다.

 

 Pic-CM01A05 , Wat Chiang Man ,   Redmi7,

이곳의 보물중 하나인 수정부처(Crystal Buddha). 10cm 정도 크기로 2세기경에 수정을 조각한거라고 한다. 하지만 서양학자들은 15세기로 보고있다.

 

 Pic-CM01A06 , Wat Chiang Man ,   Redmi7,

또하나의 보물인 대리석부처(Marble Buddha)는 석판에 새긴것으로 안내판에는 2500년전에 새긴 것이라 한다. 석가모니생존시와 거의 비슷한 시기로 실론섬에서 온거란다. 물론 그들만의 주장이다. 석가모니가 날뛰는 코끼리를 진정시킨얘기를 그렸다. 그런데 이 부처상은 철창을 두겹으로 쳐놨다. 설명도 없으면서 가장 보호막을 철저히 해놨다. 어쩌면 이 불상이 진짜 보물이 아닐까?. 

 

 Pic-CM01A07 , Wat Chiang Man _Ubosot,   Redmi7,

우보솟은 방콕 우보솟에 비하면 진짜 작다. 오두막처럼 보인다. 못들어가게 바깥에 콘크리트 담을 쌓고 문을 걸어놨다. 어설퍼 보이지만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건물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비석(둥근 그림이 있는)에는 치앙마이의 창조역사가 적혀있다. 원래 우보솟문앞에 기념비석이 있었는데(지금은 박물관에 있다) 그석판에 치앙마이가 망라이왕에 의해 1296년에 건설되었다고 적혀있었단다. 치앙마이의 건설에 대한 기록중 가장 오래된 것이란다.

 

 Pic-CM01A08 , Wat Chiang Man ,   Redmi7,

힌두의 풍습이 남아, 부처의 후광도 아직 머리7개의 나가가 대신하고 있다.

 

     여기서 잠깐 란나왕국의 역사를 짚어본다. 앞의 태국역사는 시암 쨔끄리왕실쪽에서 만든역사이므로 이번엔 란나왕국쪽에 서서 살펴 본다. 란나왕국의 건국은 1292년 멍라이가 치앙마이로 천도한 시점으로 본다. 그이전은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역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왓치앙만의 우보솟 석판에 치앙마이가 1296년 멍라이왕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진다.(년도는 얼마간 차이가 있는건 어쩔수 없다).  6대 쿠나왕 시절의 전성기를 거쳐, 한때는 버마와 아유타야까지도 공격했단다. 
     16세기들어 12대 케트(Ket)왕은 두번 왕위에 올랐다,첫번째는 아들에게 왕위찬탈당하고 아들죽은후 14대로 다시 복귀했으나 정신병으로 곧 죽는다. 뒤를 이은건 그의 딸이었던 15대 찌라프라빠(Chiraprapha)여왕이다, 여왕을 얕본 버마와 아유타야가 계속 공격해오자 견디다 못해 사촌인 란쌍왕자 짜이야쩨따에게 왕위인도하나(1546), 짜이야쩨따는 치앙마이에 머물지않고 란쌍에 가까운 치앙센에 머문다. 예감적중인가? 1년만에 부왕인 란쌍왕이 죽고 두동생이 왕위차지할려고 군사를 일으키자 서둘러 란쌍으로 돌아간다. (이때 에메랄드부처를 가져간다.) 란나에선 왕이 돌아오길 기다렸지만 왕위전쟁중인 짜이가 돌아올 기미가 없자 견디다못해 1551년 메쿠티왕(Mekuti)을 옹립한다.란쌍 왕위전쟁에서 두동생을 모두 깨뜨리고 왕이된 짜이야쩨다는 1555년 이번엔 란나로 군대를 보내 란나왕위를 돌려줄 걸 요구하나 격퇴당한다, 이렇게 왕위놓고 난장판이된 인도차이나에 힘센 버마의 바잉나웅왕이 침략하니 1556년 란나는 싸우지도않고 항복하고 이어 아유타야,란쌍도 잇다라 속국이 된다. 이때까지의 란나를 멍라이왕조라 부른다. 이후 200백년간은 버마식민시기라 부르는데, 사실 이기간동안에도 아유타야에 의해 점령되어 속국되었다가 다시 버마에 지배받고, 또 스스로 독립한 시기도 있어 버마지배기간이 가장 길었다고 보면 된다.  
     1767년 버마 꼰빠웅왕조 신부신왕에게 아유타야 멸망한후, 란나에 새로 온 버마총독이 위세가 대단했던 모양. 탁신대왕에 의해 다시 전쟁이 벌어지자, 평소 버마에 앙심품었던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 람풍지역 족장인 카윌라(Kawila)가 앞장에 섰다.(1775) 탁신대왕에 의해 신부신이 물러가나 다시 침입하여 20년간 치앙마이를 걸쳐 버마-시암 전선이 형성된다. 탁신과 이어지는 짜끄리왕조의 라마1세는 카윌라(Kawila)를 란나왕으로 인정하고 버마와의 전쟁을 지원하니 마침내 1797년 카윌라는 버마를 완전히 몰아내고 치앙마이를 재건하니 이를 쳇톤(Chet ton)왕조라 한다. 1816년 카윌라가 죽자 카윌라의 동생 따마랑카(Thammalangka)가 왕위를 이으려했는데 시암의 라마2세는 왕으로 책봉해 주지 않았다. 결국 따마랑카는 1년간 방콕에 가서 야양을 떤후 왕으로 책봉받게 되는데, 이게 전통이 되어 란나황태자는 왕이 되기전 방콕에 1년 가있어야 했단다. 그리고 란나는 3년에 한번씩 시암에 공물을 바쳤단다. 
    1885 영국은 버마를 점령하고 그 다음에 있는 란나의 막대한 목재(티크,Teak)를 노린다. 영국회사들이 땅을 차지하려하자 세계정세를 알리없는 란나왕(시암에선 치앙마이왕자라고 불렀던 모양,속국취급해서 한단계 낮은 급으로 불렀다)은 영국인을 적대시하게 되는데, 다급한 시암의 라마5세가 중간에 끼어 모든문제는 방콕법정에서 해결하라는 조약을 맺어버린다. 결국 란나의 땅문제는 영국과 시암 손아귀에 들어간셈이고 국제적으로는 란나가 시암의 식민영토라는 인정을 받은셈이다.  그리고 라마5세는 란나왕 딸을 5번째왕비로 맞아들여 집안 단속에 나선다.  북부의 철도와 목재채벌권을 얻은 영국으로선 귀찮게 전쟁할 필요없이 노리던 밀림의 목재를 그대로 얻었으니 공짜였던 셈이다. 마침내 1899년 시암은 행정령을 발표하여 란나지역을 모두 시암에 군으로 편입시키니,실질적인 란나왕국의 멸망이 된다. 즉, 태국역사에서는 란나의 멸망은 아유타야의 멸망인 1767이라고 선전하지만(세계사도 이를 인용) 란나역사로 보면 1899년인 셈이다.

    만일 1890년경 빅토리아여왕이 내미는 손을 잡고 영국쪽에 붙었다면, 2차대전후 독립국으로 인정받아 지금 세계지도에 란나라는 나라가 존재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