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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방콕③-골든붓다Abroad/EastAsia 2020. 2. 20. 10:02
태국-방콕③-골든붓다 & 왓파크남
(Thailand-Bangkok③-Golden Buddha & Wat Paknam)
201x. mid December
◑ Bkk24 , China town 파이팡(牌坊) , Redmi7,
◑ Bkk25 , Wat Traimit , Redmi7,
◑ Bkk26 , Wat Traimit -Golden Buddha , Redmi7,
◑ Bkk27 , Wat Traimit , Redmi7,
◑ Bkk28 , Wat Traimit -Golden Buddha , Redmi7,
◑ Bkk29 , Wat Traimit - 지하신그룹 , Redmi7,
◑ Bkk2 , Wat Traimit - 천상신그룹 , Redmi7,
◑ Bkk30 , Wat Traimit , Redmi7,
◑ Bkk31 , Wat Paknam , Redmi7,
◑ Bkk32 , Wat Paknam , Redmi7,
◑ Bkk33 , Wat Paknam-Green Glass stupa , Redmi7,
◑ Bkk34 , Wat Paknam-Green Glass stupa , Redmi7,
- 타이와서 처음먹은게 중국음식이다. 점심시간에 차이나타운이니...시장골목에 있는 유명한 돼지고기덥법(주쟈오판)먹을까 가봤더니 길건너에까지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길모퉁이 모녀가하는 식당에 들렀는데 줄곳 나혼자였다. 훈제오리구이 덥밥과 물만두(水餃子)먹었는데, 아침부터 편두통에 시달린 때문인지 원래 그런지 엄청 맛없다.지금 생각하니 소스뿌려 먹어야하는 것같다. 타이요리는 대부분 별도 소스를 뿌려먹는게 많다. 그러나 대부분 고추가 듬뿍 들어간 것들이라 손도 안간다. [본문으로]
- 왓트라이미트는 china town 입구에 있다.유명한 황금 불상이 있다. 불상은 별 이름도 없는 허름한 절에 모셔져 있었는데 1955년 옮기는 과정에서 사고로 불상 겉을 싸고있던 석회가 떨어져 나가며 안에 엄청난 황금 불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불상을 보는데는 40바트, 박물관 포함하면 200바트인데 박물관이라해봐야 불상 겉을 싸고 있던 석회와 젠넨장식이 아닐까 생각된다. 난 물론 불상만 봤다. [본문으로]
- 높이 3m, 5,5 ton의 황금 불상이다. 얼굴이 가름하여 13c-14c 슈코타이왕국시절의 불상으로 본다. 이 시기 인도가 금속상제조 수출로 돈벌이햇다는 사실로 보아 인도에서 파트별로 주조하여 옮겨와 조립했다는게 정설이다. 아유타야가 강해지며 1403년경 슈코타이에서 아유타야로 옮겨왔다고 본다. 그리고 1767년 버마군의 침공때 감추기위해 겉을 석회로 바르고 유리조각으로 젠넨장식을 한것으로 본다. 1801년 라마1세때 새로운 수도 방콕에 수많은 절을 짓게 되니 이곳에 모실 불상이 부족하여, 전국에 있는 불상을 끌어 모으게 되는데 이떄 폐허가 된 절에 있던 불상을 가져온게 아닌가 본다. 이 불상은 차이나타운 외곽의 Wat Chotanaram에 모셔져 있다가 1935년 이 절이 폐쇄되는 바람에 불상을 왓 트라이밋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시기 왓 트라이밋 또한 아주 작은 절이어서 큰 불상을 놓을 장소가 없어 20년간 양철지붕 창고에 보관했단다. 1954년 Vihara(법당)이 건설되고 1955.5.25 불상을 창고에서 법당으로 옮기게 되는데, 받침대에서 불상을 들어올리는 과정에서 로프가 끊어져 불상이 땅바닥에 나뒹구는 순간 석회가 떨어져 나가며 황금불상이 드러나게 되었다. 불상은 9부분으로 조립되었고 불상 밑단에서 파트를 분리하는 키를 발견했단다. 18K 로 계산하면 $250M(약3000억원), 금함유량은 몸체가 40%,얼굴이 80%,머리-육계(肉髻),보계(宝髻),나발(螺髮)-가 99%란다. 2010년 지금있는 법당이 건설되었다. (From wiki). 금칠한 불상과 실제 금합금은 색깔이 확실히 다르다. [본문으로]
- 태국에선 보기드문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있다. 북방불교계통이지만 차이나타운이어서 그런모양이다. 잠시 태국역사를 살펴본다. 태국의 역사는 인도차이나역사를 결정하므로 인도차이나의 역사로써 간략히 살펴본다. 일부는 베트남 여행기를 참조하면 된다. 인도차이나는 10세기까지 크메르제국(Khmer-Angkor,현 캄보디아 종족)의 지배하에 있었다. 곳곳에 부족국가형태는 있었지만 전제국가로의 힘은 갖추지 못했다.동부해안(현 베트남)을 참파(Champa)왕국이 지배한걸 제외하면 전지역이 크메르제국 지배권이었다. 크메르제국은 800년경 건국되었는데,참파왕국과 크메르제국은 힌두교를 신봉했다. 938년 동쪽해안 북부가 大越(Da Viet-베트남족)이란 독립국이 된다. 漢왕조부터 약 천년동안의 중국지배에서 벗어난 것이다. 대월이 크메르제국의 상대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크메르제국은 12-13세기 전성기를 맞으며 앙코르 와트와 앙코르돔을 건설한다. 이 시기에 세계적으로 대 사건이 벌어지는데 바로 몽골의 봉기이다. 몽골이 아시아,유럽 전지역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중국운남지방에는 대리(Dali-大理)국이 있었는데, 대월과 같은 시기 오대십국에서 독립한 나라다. 몽골의 쿠빌라이 칸이 중국을 정복하니 대리국(973~1253)도 예외가 될수 없다. 전쟁을 피해 운남의 백성이 밀림을 넘어 인도차이나로 피난오게 된다. 제대로 된 문명이 없던 곳에 뛰어난 중국문명이 들어오니 인도차이나 북부지역은 통일국가가 만들어진다. 먼저 태국 북서부 치앙마이지역에 수코타이(Sukhothai )왕국이 건국(1238~1438)되고, 조금뒤 태국 남서부지역에 아유타야(Ayutaya)왕국 (1350 ~ 1767), 라오스북부지역에 란쌍(Lanxang)왕국(1353~1828)이 건국한다. 아유타야는 수코타이를 합병(왕조는 얼마간 유지시킨 모양이다)하고 북부일부(치앙마이)는 란나(LanNa)왕국(1292 – 1775)으로 남게된다. 14세기말 인도차이나는 6개의 왕국으로 쪼개진 것이다. 서쪽에 란나와 아유타야, 중부에 란쌍과 크메르제국, 그리고 동쪽에 대월과 참파왕국. [본문으로]
- 14세기 후반부터는 아유타야왕국과 크메르제국간의 패권싸움이 벌어진다. 아유타야는 1352년,1393년 두번이나 수도 앙코르를 점령하고 통치하지만 몇년안되 다시 크메르군이 되찾는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진다. 1431년 마침내 견디다 못한 크메르왕이 앙코르를 포기하고 프놈펜으로 옮기니 강력했던 크메르제국이 멸망하고 시엠립이하 남부로 영토가 줄어들며, 캄보디아는 이후 인도차이나에서 약자로 전락하고 만다.13세기때만해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크메르제국이 졸지에 멸망한 이유는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14세기초부터 멸망할때까지는 역사기록조차없는 혼란기였던 모양이다. 이유로 드는게 전성기때 왕들이 급격히 불교로 개종함으로 종교갈등이 사회전반에 만연했다는 설, 기후변화로 물부족에 시달려 앙코르에선 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설,그리고 끝없는 왕위싸움등이 꼽힌다. 크메르제국을 몰락시킨 아유타야도 오래가진 못하였다. 버마해안에 강력한 왕국이 탄생한것이다. 따웅우(Toungoo)왕조(15c중반~1752)의 바잉나웅(Bayinnaung)왕이 버마를 통일한후 남쪽으로 눈을 돌려 1558년 치앙마이의 란나왕국을 정복하고,1559년 란쌍(라오스)을 정복, 1564년에는아유타야를 점령하여 모두를 속국으로 만들었다.인도차이나의 북부지역뿐 아니라 인도 북부지역도 점령하여 대제국을 만들었으나 전쟁으로 인한 인적재정적부담을 감당못하였다. 결국 그의 사후 정복했던 모든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통치권을 모두 잃게 된다.이후 따웅우왕조는 서서히 몰락의 길로 가게되어 인도차이나지역은 다시 아유타야가 패권을 차지한다. 아유타야는 이후 100년간 전성기를 구가한다. [본문으로]
- 18세기 들어서며 아유타야에 50년간 왕위싸움이 벌어지는데 이게 몰락의 원인이 된다. 따웅우왕국이 멸망하면서 버마(미얀마)에 새로운 왕국이 들어서는데 꼰빠웅(Konbaung)왕조(1752~1885)이다.꼰빠웅왕조 3째왕인 신뷰신(Hsinbyushin)이 1767년 4만명의 버마군을 이끌고 아유타야를 공격한다. 그는 전 왕조의 전철을 밟지 않기위해 아우타야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폐허로 만든다. 왕은 살해하고 시설과 책들을 모두 불태우고 불상의 머리는 모두 잘라 신앙까지도 짓밟아 버린다. 버마군도 독실한 불교신자들일텐데 불상머리를 잘라버렸다면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었다는 얘기다. 청나라군이 버마본토를 공격한다는 소식에 1768년 철수하는데 몇달간의 점령으로 아유타야는 폐허가 되어 그 모습이 지금 그대로 남아 있다. 왕이 없는 왕국은 분열하는데 그중 탁신(Taksin)이라는 장군이 세력을 모아 방콕 차오 프라야강 서쪽 톤부리(Thonburi)에서 왕으로 등극한다. 그는 버마군을 몰아내고 곧바로 정복에 나서 동쪽해안지역을 빼고는 전 인도차이나를 수중에 넣는다. 성공에 취했는지 스스로를 미륵불이라고 칭하며 국정을 뒤로하고 하루종일 기도만 하는통에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던 모양. 1781년 프라야산이 쿠테타를 일으켜 탁신을 하야시키는데,이 소식을 들은 차오 프라야 짜끄리(Chao Phraya Chakri) 장군(방콕을 흐르는 강이름이 여기서 나왔나?)이 급히 톤부리로 와서 쿠테타를 진압하고 탁신도 왕국에 해를 끼친 죄로 목을 자른다. 톤부리왕조는 탁신1대로 끝나고 짜끄리(Chakri)왕조가 시작되며 쨔끄리장군은 라마1세로 등극하고 수도를 차오 프라야강 동쪽으로 옮기고 국명을 시암(Siam)으로 정한다(Thailand로 개명한건 1939년, 입헌군주제-1932년 쿠테타-로 바뀐후이다). 지금의 태국왕은 라마10세로 쨔끄리혈통이다.어느나라든 영토를 최대로 넓힌 왕은 대왕으로 부르는 모양,태국인은 탁신대왕이라고 부른단다. 여러면에서 궁예와 비슷하다. [본문으로]
- 18세기 후반,산맥때문에 패권싸움에서 안전했던 동쪽해안지방에 폭풍이 일어난다. (베트남 여행기 참조).중부안남지방에서 학정에 반발하여 따이선 3형제가 봉기하여 북부 대월왕조를 멸망시킨다.허나 왕조의 후손인 응우엔안이 프랑스 용병에 힘입어 이들을 제압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데 베트남(월남)이다. 2대 민망왕때는 유명무실한 참파왕국을 멸망시키고 동남해안을 모두 장악한다. 1834년에는 캄보디아로 부터 태국군(Siam)을 몰아내 준다. 그러나 신부살해와 쇄국정책으로 결국 프랑스와의 전쟁에 패해 1862년 프랑스 식민지가 되고,이때부터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삼키기 시작하는데 캄보디아는 이미 베트남 지배권이어서 쉽게 삼킨다. 서쪽 인도와 아프칸에서 뻗어오던 영국은 1886년 버마를 삼켰다. 태국(Siam) 라마5세는 영국과 외교협정을 맺으며 프랑스를 견제하며 위태로운 상황을 헤쳐나갔지만 1893 프랑스와의 전쟁(프랑스 반군의 거점이 라오스라는 이유로 진압명분으로 프랑스가 라오스에 진군하곤 눌러앉아 버렸다. 라오스는 태국의 지배지이므로 태국이 철수 요구했으나 프랑스가 묵살,결국 전쟁선포한다. 영국은 모른척했다)에 굴복하여 란썅(라오스)를 넘겨주게 된다. 그런데 프랑스는 시암동부해안지역을 점령한채로 철수할 생각을 안했다. 결국 1906년 재협상하여 앙코르-시엠립이 포함된 캄보디아 내륙지방과 맞교환 협정을 맺는다.(앙코르지역은 내륙밀림이라 캄보디아가 베트남 힘을 빌려 시암군을 물리칠때 이 지역의 수복은 생각조차 안했는데 이때 프랑스가 뺏은 것이다. 이때 안뺏았다면 지금 앙코르와트는 태국내 여행지가 됐을 것이다. 1941년 나라잃은 비시프랑스군과 타이간 전쟁에서 타이군이 승리하여 앙코르가 포함된 시엠립지역을 되찾으나 2차대전중이고 제국주의지도를 바꿀 힘이 없는 타이인지라 의미없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속에서도 태국(Siam) 국왕이 직접 외교전선에서 뛰며 태국(Siam)을 제국주의에서 지키는데 성공하여 일본빼고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국가로 남게 된다. 그래서 태국인은 왕가에 큰 신뢰를 가지는 모양이다. 그런 태국도 2차대전때는 일본에 점령(1942-)당했다. 콰이강의 다리가 방콕 서쪽 버마국경지대에 있다. 일본군이 버마를 침공하여 포로로 삼은 영국군(버마 점령군)을 노역시켜 콰이강에 다리를 건설했는데, 죽음의 다리라는 별명으로 세계유산등록을 추진중이나 일본이 방해한다는 얘기가 있다. [본문으로]
- 세상일은 운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국가나 민족에도 그렇다. 다른 여행기에도 적었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지역을 지배했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19세기말 국제법에 따른 제국주의지도가 완성되기 바로전의 국경이 중요하다. 700년전과 비교해보면 가장 운이 좋은 민족은 베트남민족이다. 따이선 3형제가 반란을 일으켜 제때 왕조를 무너뜨리지 않았다면 대월은 기득권유지에 급급하여 중국 귀퉁이 북쪽해안에만 만족했을거다.허나 기득권이 무너지고 새로운 기득권을 위해 싸움으로써 동남해안 전체를 지배하고 지배기간이 수십년 밖에 안되었지만 운이 따라줘 영구적 지배권을 얻게 된것이다. 가장 운이 없는 민족은 참족이다. 1000년전 동쪽해안 모두를 지배했던 민족이 모든걸 잃고 자바섬으로 흩어졌다. 산림지역이 대부분인 란쌍(라오스)는 언제나 약자로 있었고 치앙마이(슈코타이-란나)지역도 약자로 언제나 강자의 먹이가 되었다. 지배에 익숙한 지역이어서 그런지 치앙마이는 평화롭고 사람들은 느긋하다. [본문으로]
- 방파이(Bang Phai) MRT역에서 본 왓파크남(Wat Paknam). 거대불상 뒤의 쁘랑(Prang, 삼각뿔모양의 불탑)이 목적지이다. 저탑 3층에 녹색유리로 만든 작은 쁘랑이 또 들어 있다. 입장료는 없다. 불상은 2020년 완공을 목표로 건설중이며 높이는 69m, 쁘랑은 80m. 본전은 따로 있고 상당히 붐비는데 20세기 초반 명상으로 아주 유명한 승려가 주지였다고 한다.. 들어가자마자 좌선한 동상이 있다. 왕실사원중 하나로 1610년 아유타야시절 지었다고 한다. 타이 절들은 경쟁하듯 독특한 풍물을 만들고 있다. 입장료가 없는걸로 보아 관광객 끌려고 그런거는 아닌듯 보이는데 신도들이 특색있는 절을 찾는걸까? 그건또 아닌게 본전은 붐비는데 쁘랑은 한산하였다. [본문으로]
- 운하에서 본 왓파크남. 저 건물이 본전으로 보인다. 대불과 쁘랑(Prang)은 다른 건물에 가려서 절에 들어가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방콕은 운하가 발달하여 잘 꾸미면 제법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거리를 만들수 있을거로 보인다. [본문으로]
- 아침부터 편두통이 시작되어 진통제 먹고 나왔는데도 효과가 없었다. 오후 4시 안되었는데 도저히 견딜수 없는 지경까지왔다. 구토가 일어나며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저녁이고 뭐고 호텔로 돌아가는게 급선무였다. 방콕올때 좀 편하게 올려고 비상구 좌석을 3만원 주고 구입했는데, 이게 실수였다. 옆좌석엔 체육계 남학생 둘, 복도건너엔 나이든 이가 있었는데 매너가 조금도 없다, 양쪽에서 앉자마자 슬리퍼 꺼내 신는데 발냄새가 코를 찌른다. 또 엔진에서 기름 냄새가 좀나는데 걱정할건 아니라는 방송까지 한다. 늙은이는 타블랫까지 꺼내 만지작하는데 처음쓰는지 화면 밝기를 도통 조절 못하는 통에 잠을 잘수가 없었다. 한마디할려다가도 여행첫날부터 기분 잡치게 하곤 싶지않아 6시간을 참고 왔다. 장시간 밀폐된 공간에 있었으니 편두통 오는건 당연했지만 이렇게 심한것은 다 매너0인 인간들 때문이다. 호텔부근 MRT역앞에서 과일과 돼지구이를 사들고 들어가 샤워하곤 그대로 뻗어버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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